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먼드 핼리 (문단 편집) === 청년 천문학자 ===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남반구]]의 존재를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허나 대항해시대에는 알지도 못하는 항해길에 안전하게라도 가려고 대부분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해길을 따랐고, 거기에 개척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남반구의 별자리 지도를 만든다는 건 무리였다. 16세기가 종말을 고하려 해도 늘 연구가 가능한 북반구 별자리 지도에 비해, 남반구 별자리 지도는 드문 드문 단편의 정보만 있을 뿐 완성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성립되고 식민지의 개념이 잡히면서 남반구를 좀 더 안전히, 더 멀리 탐험할 수 있는 남반구 별자리의 완성이 간절했다.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존 플램스티드는 망원경을 이용한, 좀 더 정확한 북반구 별자리를 연구하고 있었다. 천문대를 들락날락하던 핼리는 플램스티드로부터 망원경을 통한 별자리 연구를 계속해서 권유 받고 있었고, 그래서 남반구 별자리 지도를 망원경을 사용해 완성하자는 계획을 낸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던 [[찰스 2세]]와 아버지, 그리고 [[동인도 회사]]의 투자를 받아 1676년 11월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을 방문하는 '제1차 헬레니안 항해'를 떠난다. 거기서 망원경을 통해 남반구 별자리를 채워넣기 시작했는데 다음 해 1월에 잉글랜드로 항해하기 전까지 341개의 별들의 경위도를 작성한다. 그 밖에 섬에서 관찰을 하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천문 현상을 목격하는데, 바로 [[수성]]의 태양 횡단(Transit of Mercury). 핼리는 수성의 횡단을 통해 진자(振子) 운동을 목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 태양계의 정확한 거리 계산법을 유출해 낸다. 1678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는 바로 정리해서 발표 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로버트 훅]].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천문학자 겸 정치가 요하네스 헤빌리우스(Johannes Hevelius 1611-1687)는 '''망원경 없이''' 연구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훅이 헤빌리우스의 연구는 망원경 없이 했으니 무효라는 발언을 한다. 잘못하다간 무의미한 외교전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플램스티드의 추천을 받아 폴란드 [[그단스크]]로 핼리가 잉글랜드 왕립협회 특사 중 하나로 파견된다. 결론은 헤빌리우스가 눈이 워낙 좋아서, 이미 사람의 시야를 앞서가던 망원경과 기타 관측 장비가 없어도 정확하게 별자리를 집었던 것. 싱겁게 일이 끝나자 잉글랜드로 돌아와 그해에 1678년에 남반구의 별 341개를 정리한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를 발표, 잉글랜드 천문학계의 떠오르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 논문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또한 잉글랜드 왕립협회의 회원이 된다. 이게 만으로 22살 때 이야기. 그 덕에 남반구의 [[튀코 브라헤]]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nckdhjBqsq1qbqjoyo1_1280.jpg]]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의 일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